소설가 되어보기 with AI

에세이

한 번쯤 소설이나 만화를 보며 나도 소설을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일이 일기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AI가 등장하고 나서 프로그래머가 하던 코딩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게 되거나, 프로그래머라는 직업 자체가 대체될 것이라는 뉴스를 보며 위기감을 느낀 적이 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나 그림을 그리는 창작의 영역에서도 AI가 기존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내용도 본 적이 있다.

내가 하던 일에서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반대로 쉽게 시도하지 못했던 다른 영역에서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AI를 사용한다면 나도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AI로 웹툰 만들기

사실 이전에 AI로 웹툰 만들기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웹툰 생성 하네스도 있었고, 단순히 시나리오만 던져준다면 원하는 웹툰이 쉽게 뚝딱하고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시작했었다.

시나리오는 아빠 개발자의 하루를 정리한 나의 글을 기반으로 웹툰을 만드는 것을 시도했고, 결과는 생각보다 처참했다.

단순히 원하는 시나리오의 텍스트만 던지고 웹툰 생성을 요청했지만, 대화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채 생성되거나 생성된 장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미지를 생성하는 작업이다 보니 AI의 처리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고, 토큰 사용량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함께 웹툰을 생성한 다른 분들 중에는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은 웹툰을 만들어낸 경우도 있었다. 그때 잘 생성된 웹툰과 나의 결과물을 비교해 보면서, AI에게 참고 자료로 제공한 데이터와 시나리오, 그리고 후보정 과정에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AI로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에도, AI를 활용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은 결국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AI로 소설 만들기

두 번째로 AI로 소설 만들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시작은 웹툰 생성 하네스와 같이 소설 생성을 도와주는 하네스가 있지 않을까 싶어 하네스 검색부터 시작했다. 쉽게 소설 생성 하네스를 찾을 수 있었고, 해당 플러그인을 설치하면서 웹툰을 생성했던 때와 같이 소설이 쉽게 뚝딱하고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소설 생성 하네스를 바로 믿고 사용하기보다는 AI를 활용해 설계 단계부터 차근차근 진행하였다. 판타지 장르를 선정하고, 우정과 관련된 내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세계관 설계에서는 포켓몬스터 세계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소설 작품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고, 각 소설의 문장 스타일과 사람 간의 대화 말투를 참고하여 실제 소설을 작성하기 전에 지켜야 할 규칙들을 구축하였다.

설계를 시작으로 여러 규칙을 설정하고 소설 작품들을 참고하여 소설의 1화를 생성하였다. 결과는 생각보다 참담했다.

소설은 시골을 배경으로 작성되었고, 참고 소설 작품 중 황순원 선생님의 「소나기」가 사용되었다. 특히 「소나기」의 한국어 절제형 문체와 감정을 사물의 상태로 옮기는 방식이 참고되어서인지,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시골에서나 쓸 법한 단어나 대화들이 소설에 등장했다.

그리고 문장의 글자 수는 상한만 정해져 있고 하한은 정해져 있지 않아서인지, 짧은 문장이 여러 번 나열되면서 글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포함해 후보정을 통해 결과물을 수정하고, 부족한 부분에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는 반복 작업을 진행하였다.


되풀이된 것몇 번
이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지칭)6번 이상
짧은 문장이 계속 이어진다3번
누가 말하는지 모르겠다2번
어른 말투가 어색하다2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 읽힌다2번
설정을 독자가 알 수 없다2번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판타지 소설이다 보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용어들이 있었고, 이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문장이나 대화를 추가하는 보완 작업도 필요했다.

한 화당 5,000자 내외로 작성하여 총 3화의 소설을 생성하였고, 3화까지 생성된 이후에도 읽고 보정하는 작업을 반복하며 수정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단편 소설로 10,000자 내외의 작성을 목표로 시작했지만, 3화까지 작성하다 보니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졌다.

3화까지 작성한 이후에는 1화부터 3화까지 다시 읽어나가며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주석을 남기고, 이를 한 번에 수정 요청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이야기가 뒤로 진행될수록 세계관의 규칙이 틀어지거나, 앞서 설정한 규칙들이 지켜지지 않은 채 작성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현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정을 진행하면서 문득 차라리 내가 직접 소설을 작성하고 AI를 검수나 교정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나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AI를 사용해 코드 작성을 시킬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소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AI에게 소설을 작성해 달라고 요청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소설 생성 하네스를 사용하고 세계관과 규칙만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시작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생성한 소설의 결과물이다.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소설이다. 제목은 「안개턱의 색동」으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색동이라는 짐승과의 우정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안개턱의 색동

EP001물림

물빛에 붉은 것이 번졌다.

단이는 논둑에서 멈췄다. 어젯밤에 물을 댄 아래 다랑논이었고, 흐린 물 위로는 붉은 줄이 길게 풀렸다. 안개는 아직 안개턱에 걸린 채였다. 해가 능선을 넘지 않아 논물이 검었고, 붉은색만 도드라졌다. 무논 가장자리에 흰 것이 얇게 앉았다. 밤새 앉았다가 해가 들면 걷히는 것을 마을에서는 서리라 했다.

붉은 줄의 끝에 무언가 엎어져 있었다. 개보다 길고 노루보다 말랐다. 뒷다리 하나가 바깥으로 꺾이고, 그쪽 털이 젖어 뭉쳤다. 단이는 다가가지 않고 논둑에 쭈그려 앉았고, 무논의 개흙 냄새가 발밑에서 올라왔다. 엎어진 몸이 목을 조금 들었다. 눈이 단이 쪽으로 왔다가 지나갔다.

털은 흰색이었다. 젖은 데는 어둡고 마른 데는 희었는데, 그 흰색이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옅어졌다가 돌아왔다. 색이 저렇게 흔들리는 것은 색동뿐이라고 아버지가 말했었다. 안개턱에서만 내려온다고도 했다. 단이는 색동을 본 적이 없었다. 물비린내에 쇠 냄새가 섞였다.

"거기 누우면 물 다 흐려져."

흰 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이는 벼 사이로 내려가 물꼬 판자를 반쯤 들었다. 붉은 물이 빠지자 위에서 맑은 물이 들어와 그 목 아래를 지나갔다.

"위에서 오는 물이야."

판자를 내리고 논둑으로 올라갔다. 안개가 아래로 밀리고 위쪽 밭에서 유지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단이는 논둑에 앉아 벼 밑동을 훑었고, 우렁이가 손에 잡혔다. 그동안 흰 것이 얼굴을 두 번 들었다.

"내 논이야."

귀가 한 번 움직였다.

"이건 안 줘."

우렁이를 논둑 흙 위에 모아 놓았다.

"산에서 왔어? 저기."

안개턱 쪽으로 턱을 들었다. 흰 것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매미 소리가 끊겼다. 위쪽 논의 벼가 한쪽으로 누웠다. 바람은 반대쪽에서 왔다.

벼 사이에서 들개 한 마리가 논둑 위로 올라섰다. 털이 누렇고 어깨가 단이 허리쯤 왔다. 단이는 두 발 물러나 멈췄다. 뒤가 위 논 축대였다. 들개가 논둑을 따라 옮겨 그 앞을 막았다. 모아 놓은 우렁이가 발밑에서 논둑 아래로 굴렀다.

목구멍이 말라 침을 삼켰다. 삼키는 소리가 제 귀에 크게 났다. 물에서 소리가 났다. 흰 것이 일어서니 마른 몸이 들개만 했다. 꺾인 뒷다리를 끌면서 논물을 건넜다. 들개가 뛰었다.

흰 것이 그 앞을 몸으로 막자 두 몸이 논둑 아래로 굴렀다. 물이 튀어 단이 얼굴에 닿았다. 미지근했다. 단이는 논둑 흙을 더듬어 돌을 집었고, 손바닥이 젖어 한 번 미끄러진 것을 고쳐 쥐고 던지자 돌이 들개의 등에 맞았다.

"가. 저리 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들개가 뒷걸음쳤다. 벼 사이로 사라지자 젖은 털 냄새가 남았다. 단이는 숨을 두 번 크게 쉬었다. 무릎 뒤가 저렸다.

흰 것은 물에 엎어져 숨을 몰아쉬었고, 찢긴 목덜미에서 붉은 것이 흰 털을 타고 내려와 물에 닿았다. 흰색이 짙어졌다. 등에서 목으로 가는 선이 털 바깥으로 새어 나와, 논물에 비친 윤곽이 두 겹으로 흔들렸다. 단이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을 뻗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물 다 흐려졌어."

흰 것이 얼굴을 물에서 들자 그 색이 조금 가라앉았다. 곧 몸을 일으켜 뒷다리를 끌면서 논둑으로 두어 걸음 올라가다 주저앉았고, 그쪽이 안개턱이었다. 단이의 손이 앞으로 나갔다가 멈췄다. 잡을 데가 없었다.

단이는 일어섰고, 어깨가 앞으로 말린 채 지게를 논둑에 두고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해가 초가지붕 위로 올라올 무렵 단이는 웃말에 닿았다. 마당에 실이 널려 말랐고, 옹배기에서 잿물 냄새가 올라왔다.

"단이구나. 지게도 없이 왔다."

"붉은 실 하나 주세요."

어른의 손이 실 틀에서 떨어졌다. 손가락 끝마디가 붉었다.

"이 실이 무슨 실인지 알고 왔니?"

"알고 왔어요. 물림실."

"색동이 스스로 목을 내밀어야 묶이는 실이다. 억지로 감으면 하루도 못 간다."

"아래 논에 있어요. 다쳤어요."

"다친 것은 목을 잘 내민다. 혼자 못 산다는 걸 아니까 그런다더라."

단이는 답하지 않고 실 틀을 봤다.

"대가를 먼저 말해 주겠다. 묶으면 세상 색이 다 빠진다."

"색이 다요?"

"회색이 되는구나. 논도 하늘도 피도 다 회색이다. 매듭을 조이는 그때 빠진다."

어른이 실 틀에서 손을 뗐다.

"곁에 있으면 돌아온다. 멀어지면 다시 빠진다."

"곁이 어디까지요?"

"멀어지면 안다. 걸음으로 셀 것이 아니다."

마당 흙 위로 어른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색동이 마음을 닫으면 곁에 있어도 안 온다."

"그건 언제 알아요?"

"안 오면 그때 알지. 미리 아는 법은 없구나."

단이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다. 실이 끊기면 곁에 있어도 안 돌아온다."

단이가 숨을 한 번 멈췄다가 쉬었다.

"그래도 주세요."

어른이 가닥 하나를 골라 훑어 내밀었다.

"사흘 뒤가 결겨루기 판이구나. 네 논 물꼬도 그 판에 걸렸다."

단이는 실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해가 안개턱 쪽으로 기울자 논물이 붉게 깔렸다. 산기슭에서 쓰름매미가 울었다. 흰 것은 아침 그 데에서 두어 발 옮겨 앉았다. 목덜미의 찢긴 자리에 딱지가 앉아 마른 피 냄새가 났다.

단이가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자 잿물 냄새가 손끝에서 올라왔다. 손이 멈췄다. 세 해 전에도 손에 아버지 옷자락이 있었다. 안개턱 쪽으로 가는 것을 잡았다가 단이가 놓았다. 실이 손가락 사이로 늘어졌다.

흰 것이 목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찢긴 자리가 단이 손 밑으로 왔다. 단이는 실을 목에 두르고 두 번 감았다. 매듭을 조이자 실이 손에서 떠났는데도 손끝에 걸리는 것이 남았다. 논물의 붉은 것도, 실의 붉은 것도, 손등의 마른 피도 한꺼번에 회색이 됐다.

벼가 회색이었다. 하늘이 회색이고, 안개턱 위에 남은 해도 회색이었다. 소리는 그대로였다. 물꼬를 넘는 물, 발치의 숨. 잿물 냄새와 물비린내도 그대로였다.

"안 보여."

단이는 한 발 물러났다. 물러난 만큼 회색이 짙어졌다. 무릎이 앞다리에 닿게 다가가 앉았다. 색이 왔다. 무릎이 닿은 데서부터 털이 희고, 목덜미의 딱지가 검붉고, 기운 해가 논물에 붉게 깔렸으며, 손톱 밑의 흙과 마른 피가 다시 갈렸다.

단이는 손등으로 그 털을 만졌다.

"서리."

귀가 한 번 움직였다.

"서리."

이번에는 목을 들었다. 서리가 몸을 일으켰다. 뒷다리를 끌면서 논둑 위로 올라서더니, 안개턱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걸음을 옮겼다. 또 옮겼다.

색이 빠졌다. 멀어지는 만큼 빠졌다. 회색이 그 자리를 메웠다.

단이는 논둑에 앉은 채였다. 빈손이 당겨졌다.

EP002

물을 뺀 논배미 바닥이 누렇게 드러났고, 발자국이 촘촘했다.

단이는 둑에 서서, 흙이 말라 갈라진 위쪽부터 아직 검은 아래 골까지 눈으로 짚어 나갔다. 간밤에 봇도랑을 막아 물을 뺐어도 저 골에는 물이 남는다. 실을 묶은 지 사흘이었다. 그날 저녁 안개턱으로 올라간 서리가 이튿날 새벽 논둑에 돌아와 앉았다.

명절 판에 사람들이 배미를 둘러 늘어섰다. 물들인 옷이 바랜 무명 사이에 섞였고, 마른 짚 냄새에 두엄 냄새가 올라왔다. 위쪽 다랑논의 벼가 노랗게 앉았고, 해가 높아 그림자가 발밑에 짧게 붙었다. 손끝이 당겨졌다.

서리는 배미 가운데였다. 뒷다리를 아직 조금 끌었고 목덜미에 딱지가 앉았다. 건너편 둑에서 아랫말 아이가 내려서자 뒤따라 내려온 몸이 서리보다 한 뼘 컸다. 목덜미에서 등으로 가는 선에 푸른 것이 앉았다. 털 끝까지 그 색이 갔다.

서리의 흰 것이 옅어졌다가 돌아왔다.

"그 물꼬 우리 거야."

아랫말 아이가 턱을 들었다.

"저 물꼬 내 거야."

웃말 어른이 배미 위쪽 둑으로 올라서더니 두 아이 사이로 발을 옮겨 서서 양쪽을 갈랐다.

"그건 판에서 가릴 일이다. 실 묶은 사람만 배미에 든다."

단이는 배미로 내려섰다. 마른 흙이 발밑에서 갈라졌다.

"손대도 돼요?"

"사람 손이 색동에 닿으면 그때 진다. 주저앉는 쪽이 지는구나."

"물꼬도 판 안이에요?"

어른이 하늘을 봤다. 해가 배미 한가운데에 걸렸다.

"배미 안은 다 판이다. 배미 흙만 안 밟으면 된다."

단이는 아래 골을 발끝으로 눌러 보았다. 위쪽 흙은 딱딱하고 골 쪽은 발이 반 마디쯤 들어갔다. 어른의 눈이 두 색동을 차례로 지났다.

"흰결이구나. 저쪽은 푸른결이고."

"그게 뭔데요?"

"지닌 색이 다르다는 말이구나. 나머지는 저희끼리 안다."

"시작해라."

두 몸이 배미 가운데에서 붙었다 떨어졌다. 마른 흙이 무릎 높이로 일었다. 서리의 앞발이 밀렸다. 발자국이 뒤로 길게 그어졌다.

"가."

단이는 둑 안쪽을 따라 옆으로 옮겼다. 옮긴 만큼 흰 것이 옅어졌다. 푸른 것이 어깨로 밀고 들어왔다. 서리의 목이 옆으로 꺾였다가 돌아왔다.

"막아."

서리가 몸을 세워 받았다. 두 몸이 갈라지면서 일어난 먼지가 사람들 쪽으로 밀려갔다. 서리가 따라 돌다 뒷다리에서 한 번 접혔다. 다친 쪽이었다. 서리의 흰 것이 짙어지고 윤곽이 번졌다. 등에서 목으로 가는 선이 털 바깥으로 새어 나와 두 겹으로 흔들렸다.

푸른 것이 다시 붙어 어깨로 눌렀다. 서리의 앞무릎이 흙에 닿았다. 닿은 데서 무릎이 미끄러져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단이의 어깨가 앞으로 말렸다.

"버텨."

서리가 버텼다. 앞발이 마른 흙을 파고 발톱 자국이 넷 남았다. 푸른 것이 몸을 빼더니 옆에서 들이받았다. 서리가 넘어지면서 흙 위를 한 바퀴 굴렀고, 구른 자리에 젖은 흙이 드러났다. 일어선 서리가 안개턱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배미 건너도 아니고 단이 쪽도 아니었다.

"돌아."

서리가 돌았다. 젖은 털 냄새가 배미 안에서 올라왔다. 아침에 물을 뺀 데라 흙이 아직 속으로는 젖었다. 푸른 것이 붙고 떨어지는 사이 서리의 발이 조금씩 아래로 밀렸다. 밀린 만큼 아래 골에 가까워졌다.

"더 아래."

단이는 아래로 지시했다. 밀리는 쪽으로 지시했다. 서리의 뒷다리가 다시 접혔다. 이번에는 목까지 눌려 얼굴이 흙에 닿았다. 흰 것이 털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흙에 닿은 데부터 옅어졌다.

아래 골에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판자를 반만 들면 그 물이 어느 발자국부터 먹어 들어오는지, 단이는 간밤에 물을 빼면서 손으로 짚어 두었다. 손이 서리 쪽으로 나갔다. 나가다 방향을 바꿨다.

손이 잡은 것은 봇도랑 판자였다.

"거기서 버텨."

단이는 봇도랑을 따라 위로 달렸다. 배미 가운데가 뒤로 물러났다. 흰 것이 옅어졌다. 멀어진 만큼 옅어졌다. 배미도 벼도 사람도 한 덩어리로 붙어 회색으로 앉았고, 판자와 홈통이 어디서 갈라지는지 손으로 더듬어야 했다.

판자를 반쯤 들었다. 물이 봇도랑 턱을 넘었다. 물은 마른 위쪽을 지나 아래 골로 갔다. 갈라진 흙이 물을 먹고 소리를 냈다.

건너편 것이 밟은 검은 데가 먼저 잠겼다. 앞발 하나가 들어가더니 빠지지 않았다. 몸을 비틀자 뒷발까지 개흙을 물었다. 서리가 그 어깨를 밀었다.

건너편 것이 한 번 더 몸을 세우려다 앞무릎을 접었다. 물이 그 배 아래까지 왔다. 주저앉았다. 웃말 어른이 물이 든 데까지 내려와 발끝으로 흙을 짚었다.

"주저앉았구나. 아랫말이 졌다."

"저건 물이잖아요."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색동에 닿은 것도 아니다. 물때를 아는 것도 제 논 아는 것이구나."

어른이 봇도랑으로 올라와 판자를 마저 들었다.

"물꼬는 웃말 것이다. 여기까지다."

사람들이 둑에서 흩어졌다. 어른이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둑 끝에 짐을 진 사람이 하나 섰다. 그 사람이 봇도랑을 따라 걸어왔고, 옷이 낡았고 봇짐에서 눅은 냄새가 났다.

왼 손목에 흰 자국이 실처럼 감겨 있었다. 두 번 감긴 자국이었다.

"이겼다지. 그런데 너, 아까 그 색동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지."

단이는 손톱 밑을 긁었다.

"뭐라고요?"

"배미에 든 건 색동이고 너는 둑에 섰지. 이름 없이도 잘 부린다."

"나는 색을 못 본다. 그래서 판을 소리로만 듣는데, 오늘은 이름이 한 번도 안 났지."

사내가 왼 손목을 쓸었다. 엄지가 자국 위를 두 번 지나갔다.

"아저씨 누구예요?"

"이름은 묻지 마라. 나도 네 색동 이름은 묻지 않았다."

"실 끊고 다니는 사람 맞아요?"

"끊는다. 목을 내밀어서 묶인 실이니 목에서 풀면 그만이지."

사내가 눈을 반쯤 감았다.

"묶으면 사람은 색을 잃고 색동은 산을 잃는다. 둘 다 잃는 걸 왜 곁에 둔다고 하는지 나는 모르지."

단이는 무릎을 끌어당겼다.

"그건 아저씨 일이고요."

"내 일이지. 그래서 네 것도 언젠가 내 일이 된다."

"지금은 안 끊는다. 실은 목에 있고 네 손에는 없으니 서두를 것도 없지."

"다음에 올 때는 이름을 듣겠다. 부르는 사람 실은 끊기가 더 어렵지."

발소리가 둑을 따라 멀어졌고, 짐은 등에 그대로였다. 단이는 몸을 돌렸다. 서리가 발치에 앉았다. 무릎이 앞다리에 닿았다.

흰 것이 없었다. 논물이 회색이고 벼가 회색이었다. 배미를 밟고 간 발자국도, 아직 흐린 물이 도는 물꼬도 회색이었다.

단이는 손을 내렸다.

손등 밑에 털이 있었다.

눈앞에는 없었다.

EP003피어남

겨루기가 끝난 그 밤이었다.

다랑논 물꼬를 셋 다 짚는 동안 마을이 회색이었다. 담 너머 어느 집에서 개가 한 번 짖고 그쳤다. 삽짝을 밀면 마당이 온다. 삽짝을 밀었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마당 가운데 선 사람의 어깨선이 담보다 높았다. 등에 얹힌 덩어리가 그 선을 한 번 꺾었다. 부엌에서 식은 재 냄새가 넘어왔다. 담 밑 장독대의 둥근 것들은 크기로만 갈렸다.

빈손이 옆으로 당겨졌다. 늘 당겨지던 쪽이 아니었다.

"늦게 다닌다. 물꼬는 밤에 봐도 물때가 안 바뀌지."

봇짐의 눅은 냄새가 마당을 건너왔다. 단이는 삽짝 안에 한 발 들여놓고 멈췄다.

"네 색동은 아까부터 여기 앉아 있다."

사내의 발치에 색동이 둘 앉았다. 마당 흙과 그 등 사이에 금이 서지 않았다. 단이가 두 걸음 가서 무릎을 접자 억센 털이 손금 사이로 들어왔고, 등이 단이 손목께였다. 손을 떼고 옆으로 옮기니 그쪽은 등이 한 뼘 낮고 목덜미에 딱지가 걸렸다. 가까워져도 흰 것이 없었다.

"저건 뭐예요?"

"그건 네가 물을 게 아니지. 오늘 물을 것은 목에 감긴 실 하나다."

단이는 일어섰다. 빈손이 다시 당겨졌고, 끝에 사람 손이 있었다.

"손 놔요, 아저씨."

"오늘은 내 손에 있다. 실은 목에 있고, 목은 여기 있지."

"그건 제 실이에요."

사내가 왼 소매를 걷었다. 마당의 회색이 그 손목 위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건 두 번 감긴 자국이다. 네 것도 두 번이고 값도 같지."

"아저씨 색은 안 왔어요?"

"안 왔다. 끊긴 실은 늘어지지. 늘어진 실에는 반대편이 없다."

단이는 눈에 잡히지 않는 실을 손끝으로 훑어 걸리는 데를 눌러 쥐었다. 단이가 한 발 물러섰다.

"저는 안 놔요."

"놓으라고 안 했다. 나는 끊는 사람이지 달래는 사람이 아니지."

손바닥에 땀이 나 실이 미끄러졌고, 걸린 데를 다시 찾아야 했다.

"여기서는 안 푼다. 산길 입구까지는 걷지."

사내가 산길 쪽으로 돌자 실이 끌렸고, 일어선 서리가 끌리는 대로 앞다리를 옮겼다. 단이는 실을 쥔 채 따라갔다. 그 뒤로 발소리가 하나 더 났다. 사내의 것보다 낮고, 넷이었다. 길섶의 칡 냄새가 났다가 끊겼다.

억새 초입에서 사내가 봇짐 안에서 무엇을 꺼냈다. 손낫이었다. 자루가 짧고 날이 안으로 굽었다.

"여기서 푼다. 산 쪽에서 풀어야 곧장 올라가지."

"여기서 안 돼요."

단이가 실을 쥔 손을 배 앞으로 당기자 그만큼 사내 쪽에서 실이 팽팽해졌다. 사내를 따라온 색동이 먼저 억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색동의 어깨가 서리의 옆구리를 밀었다. 서리가 두 발 밀리고 뒷다리가 억새 밑동에 걸렸다.

서리가 목을 낮추고 버텼다. 앞발이 흙을 파며 뒤로 끌렸다. 그 색동의 앞다리 하나가 서리의 등 위로 올라왔다. 무게가 실리자 서리의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서리는 일어나지 못했다.

"시켰어요?"

"시킨 적 없다. 실이 없는 것은 아무도 못 부리지."

억새 바깥에서 낮은 숨이 났다. 사내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실 하나 끊는 데 숨 한 번이면 되지. 오래 안 걸린다."

사내가 실을 당겼다. 낫이 걸리자 굽은 날 안쪽에 실이 들어앉았다.

"손 치워라. 날은 실만 알지 손은 모른다. 다치면 그것도 네 몫이지."

"서리."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들었다. 부르면 끊기가 어렵다고 했지, 못 끊는다고는 안 했다."

단이는 실을 두 손으로 옮겨 쥐었다.

"서리."

눌린 데에서 숨이 크게 들어갔다. 밤바람이 억새를 눕히자 아래에서 무논의 개흙 냄새가 올라왔다. 단이의 숨이 목 안쪽에서 걸렸다.

단이는 실을 놓지 않았다. 낫날과 실 사이로 단이의 손이 들어갔고, 실은 손바닥 밑에서 여전히 당겨졌으며, 사내의 손도 날도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 날이 오른 손등 뼈 위에 닿았다. 차갑지 않고 미끈했다. 손등에서 실이 먼저 눌렸다.

서리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울음이 억새를 넘어가는 사이 몸에서 빛이 돋기 시작했고, 땅이 울렸다. 눌려 있던 데에서 어깨가 단이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앞다리가 굵어지고 등이 길어지며, 억새 밑동이 그 자리부터 바깥으로 눕기 시작했다. 털이 뿌리부터 서서 목에서 등으로 넘어가며, 목덜미의 찢긴 자리를 흰 것이 덮고 지나갔다.

바람이 억새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려 나오자, 마른 풀도 개흙도 아닌 냄새가 거기 하나 섞였다. 서리의 흰 것이 왔다. 그것이 짙어지다 털 바깥으로 넘쳐 억새 초입까지 갔다.

그 뒤에 억새가 왔다. 길섶의 환삼덩굴이 오고, 아래 논의 물이 오고, 사내의 낡은 옷이 왔다. 사내가 억새 쪽으로 얼굴을 들었다. 서리에게서 나온 밝은 것이 그 눈에 닿았다. 물러나는 색동의 등에 붉은색이 앉았다. 그 목에는 아무것도 감기지 않았다.

커진 서리가 어깨로 붉은 색동을 밀쳐 억새 바깥으로 넘겼다. 낫이 실에서 빠지자 사내의 손이 열렸다. 낫자루가 흙에 떨어지며 툭, 하는 소리를 한 번 냈다.

사내가 웃었다. 어깨가 두 번 흔들렸다가 멈췄다.

"스무 해 만이다. 억새가 이런 색이었지."

흰 기운이 털 안으로 들어갔고, 억새 끝의 두꺼워진 윤곽이 도로 얇아졌다. 단이는 서리의 목에서 손까지 눈으로 훑었다. 억새에도 흙에도 떨어진 낫에도 색이 돌아왔다. 그 사이에 붉은 가닥이 없었다.

"색동은 평생 한 번 저렇게 커진다. 그것을 피어남이라 하지."

"값은 네 붉은색이다. 색동을 곁에 둬도 안 돌아온다."

"붉은색이요?"

"네 실도 붉다. 이제 눈으로는 못 찾고 손으로 찾지."

사내가 떨어진 낫을 주워 억새 밑동 옆 흙에 놓았다.

"안 끊는다. 나서는 색동은 끊지 않고 지나가지."

"아까는 끊는다고 했잖아요."

"정하러 온 것이다. 낫을 대 보면 알 수 있지."

사내가 왼 손목을 쓸었다. 자국 위를 지나던 엄지가 거기서 멈췄다.

"물꼬는 아침에 다시 봐라. 밤에 댄 물은 새는 데가 있지."

짐을 도로 지고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봇도랑 소리에 섞이다 끊겼다. 일어선 회색 하나가 그 발소리를 따라 내려갔다. 서리의 커진 몸이 억새보다 높았다.

단이는 손을 목덜미에 두었다. 숨이 크게 오르내리자 손바닥이 그만큼 올라갔다 내려왔다. 서리가 먼저 일어나 산길을 올랐다. 단이는 흙에 놓인 낫을 집어 들고 따라갔다. 동트기 전이었다.

안개턱 아래 경계에 물안개가 낮게 깔렸다. 젖은 억새가 발목에 감겼다. 이슬 내린 풀 냄새가 발밑에서 올라왔다. 단이는 낫을 들고 섰다. 자루가 밤새 이슬을 먹어 손바닥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서리가 앞에 섰다. 흰 것이 물안개 위로 떠서 능선 아래를 길게 갈랐다. 단이는 왼손을 목덜미에 얹고 털을 갈라 손끝으로 훑었다. 흰 털과 딱지 사이에서 가는 것이 걸렸다. 당겨졌다.

끊을 데에 낫날을 댔다. 굽은 날 안쪽에 걸린 것이 손끝에서 떨렸다. 물안개가 한 번 밀려왔다 물러갔다. 단이는 낫을 내렸다.

억새 밑동 옆 흙에 놓았다. 손을 뗐다. 서리가 안개턱 쪽으로 발을 옮기자 단이가 따라 올라갔다. 젖은 억새가 무릎까지 닿았다가 어깨까지 올라왔다.

경계의 억새가 끝나는 데서 발이 멈췄고, 왼손은 아직 서리의 목덜미에 있었다. 오른손 등에 무엇이 스쳤다. 단이는 손을 폈다가 오므렸다. 손가락 사이에 가는 것이 걸렸다.

눈을 내려도 손바닥에는 손금뿐이었다.

당겨졌다.

늘어져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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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ream becomes a goal when action is taken toward its achievement."